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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LL I MAKE IT HAPPEN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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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자기개발서나 각종 강의에서 하는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틀렸음 또한 알고 있다. 당신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사막에서 신기루처럼, 통장 잔액처럼. 결국은 아무 것도 없다. 변화를 시도하지 말라. 대신 다른 일을 하러 가라.

왜 사람은 변하지 않냐고? 그건 바로 '변화' 자체가 제멋대로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그저 당신이 지금 기분을 좋게 혹은 나쁘게 만들기 위해 당신이 임의로 그려낸 환상에 불과하다.

어제 나는 KHCU에서 들은 강의와 Coursera에서 들은 강의에 대해서 쓰고, 오늘은 까미노에 대해 그리고 변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변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당신은 변하고 있음과 동시에 변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당신이 변화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그저 종이 한장 차이 뿐인 것이다.

만일 내가 '변화'를 100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 정의를 하게되면 내 남은 인생에서 변화하지 않는 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이는 '변화'에 대한 건강하고 유의미한 가치가 아니다.

'변화'를 햄버거를 먹을 때 감자튀김은 절반만 먹는 것이라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에게 '변화'라는 것은 성취가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하는 변화에 대한 정의가 진정 의미가 있을까?

 

변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나 진짜 이제는 변할거야"라고 칭얼거릴 때, 실제 그들은 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상상 혹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허언증 환자가 "나 이제 거짓말 안해"라고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이 어디있단 말인가? 진짜 변했다고, 정말 앞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게 중요하기는 한가? 

우리는 변화라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스스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한 것과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것이 변화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해보기로 결심을 하는 것이 변화일까?

아니, 네가 변하던지 말던지, 내가 변하던지 말던지 누가 신경을 쓰긴 쓰나? 

바로 여기서 '변화'라는 단어의 핵심이 나타난다. 이는 바로 '정체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정체성이란 것을 변화에 포함시킬 때 우리는 변화를 감정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어, (ㄱ) "나 이제 매주 한 번은 짐에 가서 운동 할거야"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ㄴ) "이제 매주 한 번은 짐에 가서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를 할 때가 됐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때 (ㄱ)은 아주 심플하다. 그냥 가면 된다.

반면 (ㄴ)은 조금 복잡하다. 이는 매주 한 번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당신을 완전히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감정의 참여도를 높인다. 이 변화에 성공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새로운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성취감에 도취될테고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기 전까지 계속 될 것이다. 실패한다면? 마냥 나태한 자신에 대한 자책만 남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보통 실패한다.)

 

이는 '변화'란 '정체성'이 개입되는 문제임을 당시 한 번 상기시킨다. 즉, 실패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보통 "나는 헬스장에 가는 건 잘 안맞아. 아니면 그냥 운동이 안 맞는 사람일 수도 있고.. 굳이 해야돼?"라는 자기변명을 할텐데 이 말인 즉슨, 당신의 행동이 당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방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실패를 인간으로서의 실격으로 여기고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낮게 책정함으로서 스스로를 자책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변화에 대한 시도나 욕구조차도 줄어들게 되리라.

반대로 성공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성공을 했다는 것에 감정적으로 고무되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취감과 고무된 감정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한 번 변화를 꾀하게 될 것이고, 다시 한 번 해내기 위해 정진하는 태도를 가다듬을 것이다. 변화ㅡ혹은 성취ㅡ가 주는 그 감정들에 중독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른 소리 좀 잠깐 하자면, 세상에 '운동이 안 맞는 사람'은 없다. 그저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일 뿐. '생산적인 사람'은 없다. '생산적인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만 있을 뿐. '이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이기적인 행동을 덜 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조금 더 하는 사람일 뿐이다.

 

모든 게 '당신의 문제'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변화와 연결시켜 생각할 때 보통 감정은 격해진다. 감정이 격해지면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할 확률이 줄어든다.

인생은 일련의 행동과 결정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이는 늘 최선의 행동 혹은 최선의 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변화를 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 보디 빌딩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ㅡ운동을 아예 하지 않는 것, 운동을 하는 것,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 등ㅡ 중에 운동을 한다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단순히 조금 더 나은 행동과 결정을 하고싶어하는 것 뿐이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대부분은 늦게 일어나고 그게 편하다. 그리고 이는 내 인생에서 꽤나 독이 되어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왜 그렇게 일찍 잠들기가 싫었는지, 뭐든 밤늦게 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일단 공부를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한밤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아침이 어그러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아침 수업을 따라잡는다고 밤에 공부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악순환이 되는 건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어쨋거나 공부를 할 수는 있었다. 이러한 나쁜 습관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사이클이나 루틴을 만들었고, 카페인의 힘을 빌려가며 어떻게든 해낼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night owl'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았다. 밤새 공부한다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불어넣어가면서 견딘 것이다. 20대 초반까지 그랬다. 어쨋든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밤을 샐 수 있었다. 주말에 자면 체력 충전이 되었으니까. 

아침에 무언가를 먹으면 곧잘 체하곤 했다. 몸이 피곤한 채로 뭘 들이키니 당연히 속이 더부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전에는 잠이 덜 깬 채 하품을 쩍쩍 나왔지만 오후가 되어서는 뇌가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으레 이 것을 '아침형 인간이 아닌 것의 증거'로 사용했다. 

그런데 평생 가졌던 이 나쁜 습관이 언젠가부터 나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아침에 피곤함을 느끼고,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이 내 몸에 무리를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침형 인간은 아니라는 핑계로 밤에 늦게 잠들곤 했지만 분명히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내 시간이 여유로워 진다는 것을, 활력이 생기고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하기로 했다. 내 정체성이고 나발이고, 그냥 실행했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쉬는 날이나, 쉬지 않는 날이나 항상 알람을 맞춰두고 일찍 일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행여 실패할지라도 자책하지 않았다. 내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그저 실행에만 옮겼기 때문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했고, 나는 이제 일찍 일어난다. 일어나자 마자 ㅡ백수 혹은 예비 프리랜서로서 할 수 있는ㅡ 글을 투덕투덕 두드려 쓴다.

아침형 인간이란 무엇일까? 생산적인 인간이 된다는 뜻일까? 이전에 나와는 다른 내가 되었다는 뜻일까? 내가 변화했다는 의미일까? 

아니, 내가 생산적이던지 말던지, 변하던지 말던지 누가 신경을 쓰긴 쓰나? 

나조차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는 변화와 내 정체성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실행을 한 것 뿐이다. 이게 나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에 그냥 행동으로 옮긴 것 뿐이다. 나라는 인간에는 아주 작은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나쁜 행동 습관에 갇혀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대부분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폭식을 해서 살이 찐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것 뿐만 아니라 먹는 행위 자체와 정체성을 융합시켜 발전ㅡ스트레스를 먹는걸로 푼다는 식ㅡ시킨다. 그리고 이는 잠재의식에 스며들어 그들의 사회 생활, 잠버릇, 대인 관계 등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갑작스레 살이 찐 사람'이 된다. 그리고 폭식으로 인해 갑자기 살이 쪘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위해 현실과 끊임없이 타협해가며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들은 '변화'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정체성, 즉 수 개월 혹은 수년 간의 모든 관계, 습관, 정체성들을 통째로 뜯어고치려 시도한다. 

실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이어트를 하는 왕도 따위는 없다. 이미 정체성과 하나가 되어버린 습관과 모든 연결 고리를 끊는 것에 왕도는 없다. 뿌리깊게 박혀있을 '이게 나야'라는 잠재 의식이 실제로는 허구에 불가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최면술사가 아니고서야. 결국 모든 변화에 대한 다짐은 겉치레, 거짓말이 될 뿐이다.

나는 'night owl'이 아니다. 그저 밤에 늦게 자기로 선택을 한 것 뿐이다.

당신은 흡연자가 아니다. 그저 방금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피기로 선택을 한 것 뿐이다.

그녀는 운동이 안 맞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지금 운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을 한 것 뿐이다.

그는 생산적이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생산적인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변화를 꾀할 때 정체성을 빼고 행동만 투입하라. 한 번에 한 가지의 행동만 하면 된다. 시덥지않은 명분이나 이유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좋은 행동, 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기로 선택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선포같은건 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들과 목표를 공유하는 것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떠들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을 실행하는데 쓰는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우리는 모든 나쁜 습관에 정체성과 우리의 감정을 부여해 합리화하며 굳이 나쁜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ㅡ혹은 벗어나지 않고ㅡ 있다. 사막의 신기루. 통장 잔액. 뭣도 없다.

그냥 움직이면 그만이다. 자아라는 것은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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