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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나의 산티아고 Day 1 시작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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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심 따위를 할 여유가 한치라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퇴사를 하고 정신과를 가던지, 어디 산기슭에 숨어 폭포나 좀 맞아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다. 되도록이면 방배역에서 가장 먼 곳으로,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을 가고 시펐다. 가능하면 한국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컸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매일 계속되는 과한 업무의 반복과 끝도 없는 책임감을 탈출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방배 사거리 스타벅스에서 바닐라 라떼를 사가지고 복귀하는 길에 문득 차도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 그 날 결심 비슷한 걸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했다. 마침 싱가포르로의 이직이 성사되었던 참이었다. 싱가포르에 헤드 오피스를 중심으로 동남아로 한국의 의료 서비스를 수출하겠다는, 동남아 의료 선교에 앞장서겠다는, 앞으로의 성장이ㅡ회사 그리고 나 자신ㅡ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커리어의 전환을 꾀하던 시점이었는데, 전환이라기 보다는 확장과 발전의 기회였기에 꽤 신이 나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도 꽤 널널하게 주어졌다. 이듬해 2월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대충 5-6개월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보통의 직장 같았으면, 다시 말해 적당한 수위의 스트레스를 주는 회사였다면, 혹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머지 기간 동안 저축을 조금 더 하고 주변의 것들을 마무리했을 터라는 것을 알고 있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나에게는 한치의 여유가 없었다. 그 해 초부터 우울증 더불어 번아웃 증후군으로 된통 고생을 하고 있었던 상황인데 당장 돈 몇 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어달 쉬고 복귀하라는 대표님의 말씀에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라고 졸라 쿨하게 말하고 당장 퇴사를 해버렸다.

일단 낭만이 가득한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끊었다. 파리에서 재즈도 듣고, 맛있는 프렌치 레스토랑도 가고,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센느 강에서 낮잠을 자고 싶었다. 그리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길이길래 저렇게 '팬'이 많은지가 궁금했고, 마냥 쉬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에 내 몸을 조금 더 혹사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고, 내 숨소리만 들으면서 가만히 앉아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왜 까미노를 걷고싶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추측하기로는, 당시 잠실에 위치해있던 카페 알베르게에 몇 번 방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구랑 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의 산티아고라는 영화를 이대 근처 독립 영화관에서 봤던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보의 습득과 선택의 시기는 다르지 않은가? 아마 내심 동경이나 호기심 같은 것을 나도 모르게 꽤 품고 있었으리라.

여느 여행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단 하나도 습득하지 않은 채 지갑, 여권, 건강한 몸만 챙겨왔다. '어차피 다 사람 사는 동네니 내 한 몸만 건강하면 된다, 배낭을 멘 사람만 쫓아다니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좋게 말하면 호기로운, 나쁘게 말하면 무식한 정신머리와 함께.

다행히도 프랑스 남부의 어느 지점부터는 배낭을 멘 사람들끼리 일종의 유대감 같은 것이 형성되어 암묵적으로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기차를 기다리다 배낭을 두고 화장실에 잠시 갈 때는 왼 쪽의 아주머니를 살짝 쳐다보면 내 가방은 안전했고, 어디로 가야할지 얼타고 있을 때 오른 쪽의 삼촌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턱 끝으로 기차를 가르켰다. 어리버리하고 자그마한 동양인에 대한 호의였을까, 동정이었을까ㅎㅎ

그렇게 도착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가는 그 까미노의 시작, Saint Jean De Pied De Port. 영어로 하면 Saint John [at the] Foot of [the] Pass라는 의미로 카미노의 출발지 중 하나인 곳. 도시의 벽이 좁고, 자갈이 깔려있고, 여유로운 카페가 있는, 역사와 전통이 숨 쉬는 작은 마을.

Saint Jean De Pied De Port. 저 다리 위에서 어느 여행객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사진 출처: https://caminoways.com/st-jean-pied-de-port-gateway-french-way

 

사람들을 따라 성벽 바로 안쪽에 위치한 순례자 사무소에 줄을 서 "여권"을 발급받고, 구글 지도를 켜 적당한 알베를 찾아 방이 있냐 묻고, 친절한 호스피딸로로부터 배정받은 두 개의 2층 침대 중 하나에 잠시 기대어 쉬다 밖으로 나왔다.

돌길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크게 걷고, 곳곳에 있는 마트에 들러 구경을 하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으로 먹을 빵과 치즈, 햄 그리고 와인 한 병을 사서 주방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반은 비닐 봉투에 넣어 배낭에 잘 넣어두고, 나머지 반과 함께 레드 와인을 마시며 오늘의 지출과 일기를 노트에 적었다. 교통비와 바게트, 치즈, 햄, 그리고 와인을 다 합쳐도 파리에서 먹은 점심값 정도가 나왔다. 일기에는 대충 기분이 좋다, 설렌다, 와인이 맛있다 같은 소소한 것들을 적었다. 샌드위치는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민망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빵도, 치즈도, 햄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와인 한 병을 통째로 두고 마시고 있으니 호스피딸로가 다가와 말을 건다. 아니나 다를까 와인을 권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컵을 가지고 온다. 나눠마시며 수다를 떠는 동안 알베르게의 뒷뜰에서 일기를 쓰던 미국 여자도 합류했다. 괜히 체력을 비축해야 할 것 같은 노파심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네 시간이 훌쩍 갔다. 내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이야기하고, 가볍게 걷고 싶었다. 

모두가 잠든 4인실에 조용히 들어와 배낭을 한 번 더 여미었다. 조가비가 잘 달려있는지 확인하고 샌드위치를 괜히 한 번 어루만지고 배낭을 살짝 들어보니 꽤 무겁다. 잘 할 수 있을까, 다치지 말아야 할텐데,.. 하는 괜한 걱정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은 다음날 오전 5시 30분, 딱 한 번만 울리게 맞춰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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